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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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2010년 2월 6일 토요일
[사진&시] 나의 슬픔에게

2010년 2월 5일 금요일
G20회의 11월 11일, 12일 서울에서 열린다.

아..가카도 계십니다...
가카께서 의기양양하게 G20회담을 유치하면서 내뱉으셨던 말씀. 아래 말씀은 모두다 2009년 9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하신 말쌈들...특히 11월 11일이 수학능력시험 예정일이어서 청와대와 교육과학기술부 등은 수능시험일을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키로 했다.
지당하신 말씀. 여기에 덧붙혀 한마디 더 하셨습니다.“지난 100여 년 간 국력이 약해 우리의 운명을 세계 열강의 손에 내맡겨야 하는 설움을 겪었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다”
가카의 핵심은 여기에 있겠지요. 수십년 전부터 들어오던 아주 아주 익숙한 '허리띠 졸라매자' 맞습니다요. 허리띠 졸라매고 세계 각국의 대빵들이 모여서 와인잔, 막걸리잔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얼씨구 절씨구 하시는 모냥을 우리는 걍 '참고 견디면' 허리펴고 일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젠장.“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서민들이 허리를 펴고, 일하고 싶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아 오지 않겠는가”
나는...살고 싶습니다.

김진숙 민주노총부산본부 지도위원.
살아오신 세월과 그 세월을 감칠맛나는 말로 풀어내시는 분. 당신의 이야기를 묶어 '소금꽃나무'라는 책으로 엮었고, 저는 그 책을 사서 2007년 6월 7일. 싸인을 받았고. 그 이야기를 블로그에 간단히 올린적이 있습니다.
[링크]김진숙 지도위원 강연 _ 2007. 6. 7
작은 소년같은 외모지만 넘치는 에너지로 사람들을 혹하게 하시는 분. 열사들의 장례식장에 언제나 기나긴 시를 들고, 추모사를 하시며 오열하시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김진숙. 그 분이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한진중공업 해고자이기도 하지만 그 뼈아픈 세월속에서 다시 정리해고의 폭풍이 몰아치는 한진중공업 정문에서 단식을 하고 계십니다.
지율스님 단식때도 그랬지만, 사실 곡기를 끊는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았다는 뜻입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있기에 그리 목숨을 포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윤과 효율을 따져가며 352명을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세상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품고 생각은 한낱 꿈일 뿐일까...곰곰히 생각하게 합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사장에게 쓴 편지를 그대로 옮겨놓습니다.
나는..살고 싶습니다.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님께)
짧은 배움으로도 회장님의 안부부터 여쭙는 게 예의겠으나 다급한 사람의 안부를 먼저
전하는 것도 큰 결례는 아닐 듯 싶어 제 소식을 먼저 전합니다.
보고를 받으셨겠지만 저는 회장님의 정리해고 방침에 맞서 단식을 하고 있는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 진숙이라는 사람입니다.
며칠 전 몸무게를 재보니 43kg입디다. 10kg이 넘게 사라졌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몸의 변화를 물으시기에 심장을 손아귀 힘 센 사람이 꽉 움켜쥐었다가 놓는 것 같다했더니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가장 위험한 징존데요” 하시더군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새벽에 혹은 오밤중에 제 심장을 움켜쥐는 악력 센 손이 꼭 회장님의
손인 것만 같습니다.
저는 그 손아귀 힘을 뿌리칠 기력을 나날이 잃어갑니다.
두 번 째, 소변에서 거품이 부글거린다 했더니 단백뇨라는군요.
몸이 지방을 다 쓰고 근육도 다 쓰고 이제 마지막으로 몸에 남은 단백질을 쓰면서
버티는 거라고.
단백질마저 다 쓰고 나면 20일이 될 무렵부터는 이제 장기에 손을 댈 거라고.
내 몸이 살기 위해 장기를 갉아먹기 시작한다는군요.
오늘이 23일쨉니다.
14일째 되는 날은 못 일어났습니다.
몸을 일으킬 기력이 없으면 의식도 못 일어나야 옳으련만 의식은 새벽 두시에 일어나 몸을깨워 화장실 가고 세수도 하고 물도 마시자고 보채는데 딴청을 부리는 몸은 참 서럽습니다.
3일을 그렇게 누워만 있었습니다.
몸에선 살비듬이 징역 징벌방의 석회처럼 허옇게 떨어집니다.
그렇게 내 몸을 떠나가는 살비듬마저 아깝습니다.
그저께 나온 혈액검사 결과는 백혈구 수치가 2300까지 떨어졌다는군요.
5000이 정상인데. 2000이하로 떨어지면 골수에 이상이 생길뿐더러 내 몸이 어떠한
감염에도 대응할 능력이 사라진답니다.
이런 얘기들이 회장님껜 기쁜 소식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왜 이러고 있냐구요.
제 목숨뿐만이 아니라 수천 명의 목숨줄을 움켜쥐고 있는 회장님의 그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입니다.
회장님께서도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겠지만 이미 한진중공업에선 2003년 구조조정을
막아내겠다고 싸우던 두 명의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고 나서야 노조는 20년이 넘은 숙원사업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함께 해고됐던 두 명 동료의 복직과 수십 명 해고자들의 복직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만 제외됐구요.
대한조선공사를 한진이 인수하면서 이어졌던 세 명 열사들에 대한 추모공원이 지어지고,
노동조합 건물이 5층 복지관으로 번듯하게 지어져 노사가 화기애애하게 테이프를 자르고,
30억을 들여 식당이 새로 지어지고, 임금이 올라가고, 성과금이 두둑해지고..
수십 년을 싸우고 수십 명이 구속되고 해고되어도 단 한 가지도 해결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던 광명천지였죠.
저는 참 신비로웠습니다.
이렇게 해줘도 회사가 안 망하는구나.
해고자가 떼거리로 복직되고 임금이 이렇게나 오르고 노조사무실이 현장으로 옮겨져도
회사가 안 망하는 거였구나.
근데 왜 두 사람이나 죽여야 했을까.
두 사람이나 죽고 나서야 그런 일들이 이루어졌다는 게 뼈가 저리긴 했지만
전 그게 회장님 나름의 속죄의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6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일러를 켜지 않는 걸로 비겁한 속죄를 하고 있듯이.
누리면서도 불안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갈까.
이 불안한 평화의 댓가로 우린 뭘 지불하게 될까.
이 위태로운 평화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위태롭고 불안한 평화는 6년이었습니다.
그리고 9년 만에 성향이 다른 노조집행부가 들어섰습니다.
제가 작은 텐트를 치고 단식에 들어간 날이 하필이면 부산에선 6년만의 추위가
엄습했다고 호들갑을 떨던 날이었습니다.
회사에선 전기를 끊었습니다.
발전기라도 돌려달라고 노조에 요구했지만 그 무섭도록 추운 하루가 다 가도록 발전기는
오지 않았고 결국 다른 데서 발전기를 가져다 돌렸는데 새벽에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아침까지 벌벌 떨며 기다리다 노조에 전화를 했는데 “진숙이한테 기름 갖다 주지 마!”
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집행부.
오십 넘은 나이에 단식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짧게 적은 유인물마저 복사를
거부했던 집행부.
그 집행부가 들어선 지 1주일 만에 구조조정 통보를 하셨지요.
투쟁보다는 교섭에 치중했던 집행부 엿 먹으라는듯이 결국 교섭 중 정리해고 신고서를
노동부에 접수하셨구요.
정리해고를 밀어붙이는 회장님에게 만일 어떤 의도가 있는 거라면 그 의도를 무리없이
관철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 진 거죠.
352명을 신고하셨다구요.
물론 명단작성을 완료하셨을테구요.
혹시 그 352명의 하나하나 얼굴을 떠올려 보셨나요.
그의 불안한 눈빛, 굳은 살 박힌 두꺼운 손, 검은 기름때가 골골이 박힌 주름살들, 담뱃진에 찌든 누런 이빨, 어눌한 말, 한 벌을 장만하면 몇 년씩 입어대는 입성들.
그리고 가장에게 모든 걸 의지하고 사는 그의 아내. 아이들 게다가 연로하신 부모님들.
352명을 짜르면 적어도 천명 이상의 삶이 무너지겠지요.
그는 잘해야 하청노동자가 될 것이고 그의 아내는 한 달 5~60만원의 알바 자리에
인격을 짓밟히며 온갖 수모를 겪게 될 것이고 아이들은 학원이 끊길 것이고 그 아이들은
어김없이 비정규직이 될 것이고..
작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이 30,887,724원 입디다.
연봉 3천만 원짜리 철밥통들.
352명의 연봉을 합치니 10,872,478,848원 이더군요.
회장님이 굳이 짜르겠다는 352명의 목숨값을 다 합쳐봐야 회장님이 작년에 한진에서
챙겨 간 주식배당금 120억에도 못 미치더란 얘깁니다.
이 계산을 하면서 울었고 이 부분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회장님에겐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크게 표도 안 나는 그 돈 때문에 천명이 넘는
저들은 얼마나 불안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밤들을 뜬 눈으로 뒤척이고 있을까요.
그의 가족들은 또한 얼마나 두려운 채로 살얼음판 같은 시간들을 디디며 떨고 있을까요.
아직도 새벽이면 가장 먼저 눈앞에 떠오르는 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뽀오얀 콩국입니다.
단식을 하면 원래 가장 많이 먹던 음식이 생각나는 법인데 근래 콩국을 먹어 본 적이
없는데 생각하다가..
열여덟 살 겨울. 122번 화진여객 시내버스 안내양 시절.
새벽 4시 15분이면 김해에서 첫 차가 출발합니다.
첫차 손님과 막차 손님은 대부분 같습니다.
연장 가방을 짊어진 아저씨들, 큰 고무다라이를 인 아지매들.
그들은 대개 내리는 곳도 같습니다.
아저씨들은 구포 인력시장에, 아지매들은 자갈치시장에.
문짝이 덜덜거리는 새벽 첫차 안에서 빈속으로 김해벌판을 가로지르면 속은 견딜 수 없이 쓰리고 온몸이 경운기처럼 벌벌 떨립니다.
그땐 버스 안에 스팀도 없었습니다.
충무동 천일예식장이 회차 지점입니다.
거기 콩국을 파는 구루마가 있었습니다.
발이 곱아서 걸음을 게처럼 옆으로 걸으면서도 콩국 구루마까지 용케 뛰어갑니다.
기사님 꺼 까지 두 그릇을 사서 곱은 손에 받아들고 질질 흘리면서 게처럼 다시 뛰어 와
입 천장이 벗어지는 줄도 모르고 먹었습니다.
비로소 온 몸에 피가 돌고 속이 화아 해지던 온기. 저절로 나오던 한 마디.
“아! 살 거 같다!”
다른 사람들은 단식 3~4일이 지나면 먹고 싶은 게 없어진다는 데 저는 위장마저도
평범치를 못한 모양입니다.
굶는 자와 먹는 자의 시간의 길이는 다릅니다.
하루가 100시간도 넘는 거 같습니다. 특히 새벽은 대공분실의 시간보다 기나깁니다.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언제까지 할 거냐고, 단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냐고.
그때마다 저는 단 한명의 조합원이라도 지키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몰라 애가 터집니다.
많은 분들이 건강이 무너지고 난 이후를 걱정하십니다.
그러나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게 아니라는 게 확실한 상황인데 정리해고가 일상화 된
현장에서 우리 조합원들이 일상적으로 짤려 나간다면 전 살아도 산목숨이 아닙니다.
마음 같아선 회장님께 게임이라도 제안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가 하루를 버티면 한 명씩 명단에서 제외되는 게임.
백혈구가 0이 될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면 352명 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2003년도처럼 끝난 다음에 울고불고 하지 않으려구요.
두 명이나 잃고 보일러도 못 켜고 그렇게 못나빠지게 살지 않으려구요.
솥발산에도 못 가고 추모식에도 못 가고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구요.
그때 85호 크레인 밑을 끝까지 지켰던 젊은 친구들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려서
눈도 못 마추치는..
더 이상 그렇게 안 살려구요.
화장실 출입도 막으니 거울도 못 보던 상황이라 사진이라도 찍어서 제 몸을
보고 싶었습니다.
11일 째 되는 날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내 몸은 이미 영혼을 담을 능력을 상실해가는구나.
저 몸을 그대로 염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많이 울겠구나.
2003년의 나처럼 앉아서도 울고 서서도 울고 누워서도 울겠구나.
어떻게든 저 몸에 콩국 한 그릇 먹여 화색이 돌게 해야겠구나.
피땀도 흘려보고 피눈물도 흘려 본 저 몸뚱아리 딴 건 몰라도 콩국이라도 먹여
어떻게든 살려내야겠구나.
저는 아직도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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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시간 전에 단식을 풀고 병원으로 이송되셨다는 군요. 건강회복 잘 하시길 빌어봅니다.
2010년 2월 4일 목요일
97차 수원촛불, 서명운동의 달인들...^^






텍큐닷컴...도대체 어쩌시려고...

2010년 2월 3일 수요일
금연 5일째


2010년 1월 26일 화요일
용산학살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고 정대영님은 용산참사의 현장인 망루에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철거민의 삶을 알고 난 뒤 누구보다도 다른 지역 철거민들의 투쟁에 함께 해오셨습니다. 수원 신동 주민 중 한분이셨던 고 한대성 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 한대성님은 망루에서 불에 타 돌아가셨습니다.
고 정대영님은 그 망루에서 살아남은 죄로 법정에 섰습니다.
작년 7월 살던 집을 철거 당했습니다.
최근에는 3월말까지 보상협의를 끝내고 신동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1월 23일. 수원 신동에서 야간 규찰을 마치고 철대위 사무실에 몸을 눕힙니다.
그리고...1월 24일...싸느란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리고...1월 26일...한줌의 재로...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용산학살은 이렇게 진행중입니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2010년 1월 25일 월요일
철거민 또 한명 사망....

[2009. 7]수원신동 재개발 예정지역 스케치
펼쳐두기..
2010년 1월 21일 목요일
학생인권 조례는 교육의 기본이다.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2010년 1월 18일 월요일
용산참사 1주기...


2010년 1월 15일 금요일
94차 수원촛불 사진후기








[사진] 남과 여

2010년 1월 13일 수요일
2010년 1월 12일 화요일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2010년 1월 11일 월요일
이제, 학부모...헐....

초등학교(그땐 국민학교)에 입학했던 때가, 아마 80년인가 될꺼다. 기억의 조각은 운동장에서 가슴에 손수건을 단 코흘리게 친구가 줄을 서고 있는 게 전부다. 그리고 담임선생님.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졸업 앨범을 한번 들춰보면 기억이 날 성 싶다.
솔재가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천당밑에 분당이라는 그 분당을 벗어나려고 나름 노력한 결과 수원으로 이사를 오기로 결정하긴 했지만 막상 시간이 흐르고 이제 한달뒤면 솔재를 입학시켜야 하는데, 아직 이사갈 집도 정해지지 않았고, 집도 내놓지 않고 있다 보니...이제야 슬슬 오금이 저려 온다.
엊그제, 눈발이 흩날리는 시간에 수원으로 집을 보러 왔다. 보러오긴 왔는데 볼 집이 없단다. 부동산에서는 마땅한 집이 나오면 연락을 주겠다며 내 전화번호를 가져갔다. 우선 분당 집부터 내놓고 오란다. 그게 순서란다. 뭐, 내가 집을 내놓고 사고, 해봤어야 알지...
남창초등학교. 솔재를 보내려고 하는 그 학교를 솔재와 같이 와봤다. 굳게 닫힌 정문에서 창살넘어 보이는 운동장과 학교 건물만 봤지만, 그래도 마음이 설렌다. 아직 입학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내가 학교를 가는 것도 아닌데, 괜히 설렌다.
내심 학생수가 적은 학교에 보내야, 학교를 변화시키는데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 결정한 일이긴 하지만 현실이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으리라는 것. 학부모들이 다 나 같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 선생님들도 마찬가지 라는 것. 교장은 더할나위 없이 현실적인 인간일 터. 아무리 내가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벌써부터 시험걱정, 선생님한테 혼날 걱정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는 솔재. 시험보다, 경쟁보다 더 중요한 게 많다는 것을 초등학교에서 배울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공교육시스템에서 이런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초등학교. 멀리서 찾기 보다 내 아이가 다니는 집앞의 초등학교가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만들고 싶다.
[동영상] 2009년 수원촛불 영상기록
2010년 1월 7일 목요일
만원의 행복?
2010년 1월 6일 수요일
[사진] 학생인권이 좌파면, UN도 좌파냐??





[기자회견문]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











